B2B 마케터가 B2C 마케터로 전직한 이유
Q. 19년이라는 라떼님의 커리어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B2B 마케팅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저는 일본어 전공이었고, 처음에는 일본 회사 대상으로 시스템보안 솔루션을 만드는 IT 회사에서 일본어 번역 일을 시작했어요. 그러다 일본 회사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꾸려진 마케팅 TF에 갑작스레 들어가게 되었어요. 이후로 10년 넘게 B2B 마케팅을 담당했죠. 기업을 대상으로 우리 회사의 솔루션을 마케팅하고, 영업하고, 계약까지 진행하는 업무였습니다.
그런데 10년 동안 B2B 마케팅을 해오다가, 이제는 마케팅을 하고 싶지 않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MBA로 도망쳐 전략 기획 트랙을 공부했어요. 네, 도망간 게 MBA입니다. (웃음) 그러다가 다시 마케팅으로 돌아왔어요. 그렇게 B2C 마케팅을 한지 3~4년 정도 됐어요.
Q. 10년 넘게 B2B 마케터로 지내다가 MBA로 도망까지 갔는데, 다시 B2C 마케터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해요.
저의 마음을 흔들었던 건 고객사에서 해줬던 말이었어요. 당시에 어떤 스타트업의 신사업 개발을 담당했는데, 담당자 분께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 소비자를 만나서 서비스를 더 키워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구요. ‘서비스를 키우는 일은 처음부터 서비스를 구상한 사람(라떼)이 제일 잘할 것 같아요’라는 말에 움직이게 되었어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제가 B2B 마케터였을 때에는 내가 하는 일이 큰 영향력을 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현타가 왔었어요. 제가 마케팅을 잘 해 놓는지와 무관하게 최종 계약은 영업 단계에서 결정되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B2C에서는 달라요. 내가 움직이는 대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소비자의 반응을 피부로 흡수할 수 있어요. 그런 생각에 다시 마케팅으로 돌아오게 된 거죠.
사람의 행동에서 숫자를 발견하는 사람
Q. 내가 하는 일의 영향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마케팅을 하며 가장 기뻤던 순간이 있다면요?
첫번째는 숫자입니다. 마케팅은 숫자를 떼놓고 얘기할 수 없잖아요. 내가 열었던 캠페인, 광고 등 마케팅 활동의 수치적인 성과가 컸을 때가 기뻐요.
두번째는 가설이 검증될 때. 마케팅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고, 결과를 데이터로 검증하는 사이클을 반복해요. 제가 처음에 세웠던 가설이 검증될 때, 그게 데이터로 나타났을 때 굉장한 희열을 느끼죠.
Q. 결과로서 확신을 얻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시네요. 그렇다면 반대로 마케팅을 하며 가장 현타가 왔던 순간은요?
나의 주장이 숫자와 논리만으로 설득되지 않을 때가 많이 힘들었어요. B2C 마케팅을 하면서, 우리가 세운 가설이 맞았다는 것을 데이터로 증명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C레벨이나 리더십의 직감에 의해 의사결정 방향이 달라질 때가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Q. 논리와 직감의 상충.. 그런 상황에 있는 후배를 만나게 된다면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세요?
쉽지 않지만, 저는 시간을 투자해서 두 가지 안을 같이 보여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내가 생각하는 논리적인 안, 두 번째는 리더십이 원하는 안이죠. 혹시 결과 데이터가 나오면 리더십에 보여드리며 ‘여기 결과 보세요, 아니었죠? 그러니까 앞으로는 저한테 그냥 맡겨주세요.’ 이런 식으로 말해요. (웃음)
사실 이런 방식을 바로 적용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회사마다 다양한 상황과 조건이 있는데 정해진 공식처럼 적용할 수는 없잖아요. 감으로 고집하는 분들의 성격이 어떤지, 내가 어떤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했을 때 설득될지 모르니까요. 그리고 내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하니까 강력하게 추천하지 못하겠어요.
하지만, 어쨌든 ‘저 마케터가 얘기했던 내용이 실제 결과로 나왔네’라는 경험을 리더십에 반복해서 드리다 보면, 점점 더 큰 의사결정 권한을 주시더라고요.
라떼님이 생각하는 마케팅의 정의
Q. 의사결정 권한이 커지는 만큼 나의 경험치도 더 커질 것 같아요. 라떼님이 생각하는 마케팅이란 무엇인가요?
마케팅(marketing)은 시장을 뜻하는 market에 진행형을 뜻하는 ing이 붙어 있는 단어인데요. 보통 ‘시장’이라고 하면 막연하고 추상적인 하나의 덩어리를 떠올리기 쉬워요. 그런데 사실 이 덩어리를 구성하는 것은 살아 움직이는 우리들, 개개인이에요. 즉, ‘시장=사람’인 거죠. 시장을 관찰하고, 타겟을 정의하고, 페인포인트를 해결하여 궁극적으로 매출을 높이기 위한 모든 활동이 마케팅이라고 생각해요.
Q. 마케터를 고민하는 후배에게 마케팅 분야에 대략 어떤 게 있는지 간단히 설명 부탁드릴게요.
예를 들어,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소상공인 브랜드가 검색률을 높이고 싶다면 SEO 마케터가 필요해요. 광고처럼 눈에 보이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면 콘텐츠 마케터가 필요하고요. 이러한 콘텐츠를 바탕으로 광고를 집행해서 직접적으로 매출을 올리고 싶다면 퍼포먼스 마케터가 있어요. 반면 매출보다는 브랜드 인지도나 신뢰도를 높이고 싶다면 브랜드 마케터가 필요하고요. 그 외에, 카카오톡 채널처럼 고객과 접점에서 관계를 형성하는 부분은 CRM 마케터가 있어요.
저는 스타트업에서 위에 나온 분야를 거의 다 경험했어요. 스타트업은 사람이 없어서 업무를 쪼개어 담당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러다 보니, 이제는 종합적인 시야로 전체 마케팅을 디렉팅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 디렉팅이라고 한다면 규모가 큰 회사에서는 마케팅에 필요한 역할을 적절하게 배분하고, 하나의 팀을 꾸리는 일을 하게 되겠죠.
스타트업, 자기 착취를 경계하라
Q. 스타트업에서는 정말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스타트업을 꿈꾸는 마케터에게 필요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자기 착취를 경계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여기서 말하는 착취는 회사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행하는 착취예요.
저의 마케팅 커리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스타트업이었어요. 보통 주식 투자를 할 때 저평가된 기대주에 투자한다고 하잖아요. 스타트업에서 일을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이 회사가 나중에 네카라쿠배당토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서, 미래 가치를 보고 지금 나의 노동력을 쏟는 거죠. 그런데 이 매력이 오히려 독이 될 때가 있어요. 저는 이걸 ‘기회페이’와 ‘기대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해 볼게요.
- 기회페이 : 회사에서 (금전적 보상 없이) 이것저것 시키는 건 너를 위해 기회를 주는 거야.
- 기대페이 : 회사가 나중에 잘 되면 다 보상해 줄테니 조금 더 힘내자!
기회페이와 기대페이는 내적 동기, 자아실현, 성취감이 높은 인재일수록 잘 빠져들어요. 하지만 회사가 주는 기회와 기대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필요해요. ‘조금만 더 힘내보자'의 마지노선이 1년인지, 3년인지, 5년인지 회사와 논의하세요. ‘회사가 잘 되면’의 구체적인 숫자(매출 00억, 영업이익 00억, 투자 유치 00억 등)를 구두가 아닌 서면으로 확인하세요.
회사가 기대하는 수준이 무엇인지 명확히 파악하고, 나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현재를 투자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자기 착취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Q. 스타트업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기 자신을 잘 지키며 일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인하우스 마케터와 대행사 마케터의 차이가 있다면요?
저는 대행사 경험이 없어서 설명하기 어렵긴 한데요. 인하우스는 내가 담당하는 브랜드에 대한 애착이 생겨서, 브랜드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인 것처럼 느끼게 돼요. 이 때 객관성을 잃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브랜드에 대해 소비자가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계속 찾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더라고요.
반대로, 대행사에서는 해당 업계의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어서 레퍼런스를 참고하기 좋다고 생각합니다. 인하우스는 내 회사의 데이터만 보기 때문에 경쟁사의 데이터를 구하기 쉽지 않아요.
Q. 지금은 퇴사한 뒤 브랜딩/마케팅 컨설팅을 하고 계신데요. 라떼님은 앞으로 어떤 ‘자람'을 지향하시나요?
‘마음 가는대로, 마이웨이로 살아도 나쁘지 않네’의 좋은 레퍼런스가 되고 싶어요. 그 과정에서 내가 원하는 캐릭터로 스스로를 자라게 하는 게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