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근자람 레터지기입니다. 다섯 번째 자람구독에서는 작품에 기획을 더하는 10년차 학예연구사 연우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요즘 근자람은 3개월간의 베타 기간을 되돌아보고 방향성을 고민하고 있는데요.
설문 조사에 응답하여 어떤 점이 좋았는지 들려주시면 근자람이 성장하는데 큰 응원이 될 것 같습니다.
3분 투자로 '자람'에 진심인 근자람에 물을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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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본격적으로 연우님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이번 인터뷰에서는 주변에서 접하기 어려운 학예연구사의 세계를 만날 수 있었는데요.
신기하고 흥미로운 동시에,
‘우리는 지나온 날을 돌아보는 회고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것으로 소화한 후에 성장이 있다’ 는 연우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가 속해 있는 스타트업 업계의 회고 문화가 생각나 반가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연우님의 이야기, 지금부터 만나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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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차 학예연구사, 연우님은 어떤 분인가요?
-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큐텐(온라인 쇼핑 플랫폼)에서 플랫폼 기획자로 1년 3개월 간 일함.
- 큐텐을 퇴사한 뒤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
- 환기미술관 인턴을 거쳐, 이응노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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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예연구사는 큐레이터와 다른 건가요?
Q. 학예연구사라는 직업은 처음 들었어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큐레이터와 차이점이 있다면 설명 부탁드릴게요.
일반적으로 학예연구사는 아래 학예 업무를 모두 통칭하는 단어예요.
-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Curator)
- 소장품을 관리하는 레지스트라(Registrar)
- 아카이브를 담당하는 아키비스트(Archivist)
- 보존/복원을 담당하는 컨서베이터(Conservator)
즉, 학예연구사라는 직업 안에 큐레이터가 일부 포함된 개념이에요. 보통 사람들이 떠올리는 전시 기획 외에 소장품 관리, 수집 등의 업무도 하고요. 그 외에 청년작가 지원 사업과 같은 지자체 사업을 진행하기도 해요.
재밌는 거만 하면서 살 수 없을까
Q. 경제학을 전공하고 IT 회사를 거쳐 학예연구사가 되신 과정이 궁금합니다.
학부 졸업 뒤 바로 큐텐이라는 이커머스 IT 회사에 취업을 했었죠. 큐텐에서는 1년 3개월 정도 플랫폼 기획 업무를 했는데, 너무 재미가 없더라구요. (웃음) 대학교에서도, 첫 직장이었던 큐텐에서도, 항상 소속되지 못한 느낌을 받았어요. 여기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마음 같아선 잘 해내고 싶은데, 흥미가 없으니 정작 현실에서는 학교 성적도 회사 업무 퍼포먼스도 엉망진창이었죠. 당시 가족들한테 하는 일이 재미가 없다고 말하면, 돌아오는 답은 “어떻게 인간이 재밌는 거만 하고 사니?” 였어요. 되게 외롭더라고요. 인간은 왜 재밌는 거만 하면서 살 수가 없는 건지.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미술사학 대학원에 진학하게 됐어요. 학부 때 여성과 예술이라는 교양 수업을 들었는데 너무 재밌고, 미술사를 전공하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거든요. 대학원을 수료하고 미술관에 취업했을 때, 옆자리 동료와 미술사에 관한 짧은 대화를 나누며 마침내 ‘나 여기 있어도 되는구나’, 안심했던 기억이 나요. 지적 대화의 희열이랄까요? 정말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어요.
처음에 제가 대학원 진학한다고 했을 때 찬성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주변에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그런데 전공 분야를 일 하는 데 써먹을 수 있고, 동료와 심도 있는 토론까지 할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어요. 내가 공부한 것이 헛되지 않다는 생각을 했죠.
사립 미술관 vs 공립 미술관
Q. 연우님의 학예연구사 커리어를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우선 대학원 논문 주제가 김환기였기 때문에, 환기미술관에서 인턴을 시작했어요. 인턴 경험을 해보니 사립 미술관보다 국공립 미술관이 나에게 더 잘 맞을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대전에 소재한 이응노미술관에 취직해 약 3년 간 일했어요.
사실 저처럼 수료 직후 바로 학예연구사로 취직한 건 운이 좋은 케이스예요. 보통은 전시 코디네이터(전시 기획 지원 및 현장 운영)로 시작하는 경우가 훨씬 많거든요. 저는 지방 근무가 가능했던 부분도 있어서, 바로 학예연구사로 취직해 실무에 투입됐죠.
그러다가 조금 더 큰 조직에서 일을 해보고 싶어,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술은행 부서에서 1년 간 기간제 근로자로 일하게 됐어요. 미술은행은 전시를 한다기보다 민간/정부 기관에 작품을 빌려주는 일을 담당해요. 미술은행은 대여료를 받기 때문에, 수익을 가장 많이 내는 부서 중 하나예요.
그리고 나서 전남도립미술관의 개관팀으로 이직했어요. 전라남도에 처음으로 생기는 공립 미술관이었죠. 여기에서 2년 10개월 정도 일하고, 지금은 퇴사 후 쉬는 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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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사립 미술관보다 국공립 미술관이 더 맞을 것 같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생각하셨던 이유는요?
사립과 국공립의 가장 큰 차이점은 ‘돈’ 이라고 생각해요. 사립 미술관은 돈을 벌어 들이는 경로가 입장료 외에는 거의 없어요. 그래서 현실적인 예산 문제에 부딪히기 쉽고, 큐레이터들이 좋은 전시를 열기가 어려워요.
사실 미술관의 기능은 좋은 작품들을 한 데 모아 영구적으로 간직하고, 상하지 않게 보존하고, 다음 세대까지 작품을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에요. 이러한 의미 있는 활동이 예산 없이는 불가능하죠. 결국 작품 가격이 너무 비싸니 기존에 보유한 작품을 돌려 쓰듯이 전시를 기획하게 돼요.
저는 사립 미술관 인턴을 하며 예산의 한계로 다양하고 심도 깊은 전시를 기획하기 힘들었던 부분이 아쉬웠어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예산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국공립미술관에서 일하기로 결심했죠.
전시는 새로운 미션의 연속
Q.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학예연구사는 대부분 임기제 공무원이라고 들었어요. 보통 공무원은 똑같은 일만 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말씀하신대로 학예연구사는 대부분 임기제 공무원이에요. 2년에서 5년 사이로 근무하는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죠. 하지만 선입견과 다르게, 학예연구사는 항상 새로운 일을 마주쳐요. 전시는 새로운 미션의 연속이거든요.
우선 전시 테마가 항상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주제를 가지고 기획전을 열 수도 있고, 작가 한 명에 대한 작가전을 열 수도 있어요. 전남도립미술관 개관팀에서 일했을 때는 지자체만의 미술사를 새로 만들어야 했죠. 아예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전라남도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를 발굴하고, 그 사람의 생애를 처음부터 끝까지 파악했어요. 자택에 방문하여 편지, 사진, 비디오 등 모든 콘텐츠를 디지털로 변환하여 유족 분들께 전달하고, 전시에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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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문화재 전시를 할 때도 있어요. 고미술 분야를 다루는 방식은 현대미술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굉장히 도전적인 일입니다.
따라서 학예연구사가 똑같은 일을 한다는 거는 오해예요. 매번 새로운 일을 마주치는 도전적인 환경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수많은 변수가 발생하는 전시를 차질 없이 준비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전시의 A to Z
Q. 전시는 그냥 열리는 게 아니었네요. 그러면 전시가 관객에게 다가가기 전까지 A to Z를 설명 부탁드릴게요.
우선 ‘어떤 컨셉으로 전시를 하고 싶다’라는 전시 발의로 시작해요. 전시 발의가 채택되면 전시 준비에 들어가요. 전시 준비란 작품을 찾고 대여하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해외 미술관은 1년 전에 작품 대여 요청을 하지 않으면 안 빌려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심지어 1년도 정말 빡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전시 준비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에요. 요즘은 국내 미술관도 최소 3개월이 필요합니다.
신규 기관은 작품을 빌리기도 어려워요. 해당 기관의 레지스트라(Registrar) 담당자가 방문 실사를 하거든요. 작품을 빌려줄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어 있는지 일일이 확인해요. 물 새고 습기 가득한 공간에 작품을 빌려줄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해당 미술관 내부의 대여 심의 과정도 있어요. 최종 승인을 받고 나서야 작품을 빌릴 수 있는 상태가 돼요.
덧붙여, 국공립미술관은 보통 소장품이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죠. 그런데 사립미술관은 작품 공개가 필수가 아니에요. 그래서 무슨 작품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이럴 때는 내가 옛날에 봤던 전시의 도록을 찾아, 어느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유했는지 기억해낸 다음 대여 요청을 하기도 해요.
Q. 학예연구사는 작품에 대한 기억과 지식이 풍부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 다음 과정은 무엇인가요?
작품 대여가 승인이 났으면 이제 배치를 해야겠죠. 사실 큐레이터 업무의 핵심은 작품 디스플레이예요. 내가 작품을 어디에 놓을 것이며, 동선은 어떻게 배치할 것이며, 조명은 어디에 어떻게 쏠 것이며, … 이런 것들이 다 결정이 된 상태에서 작품이 들어와야 하거든요. 여러분이 전시장에 갔을 때, 작품 하나하나 큐레이터의 의도가 들어있다고 보면 돼요.
작품 배치가 결정되면 이제 배송할 차례예요. 빨리빨리의 민족인 한국과 달리 해외는 운송이 느린 편이에요. 우선 나무로 된 크레이트를 짜야 돼요. 작품을 대여해 준 기관에서 나무의 소재까지 정해주는 경우도 있어요. 작품이 한국으로 배송되고 나면 한국 기후에 적응하는 ‘기후 적응’ 시간이 필요해요. 24시간에서 48시간 정도? 작품도 살아 숨쉬는 하나의 생명체라고 보시면 돼요.
그 다음은 작품을 디스플레이하는 단계예요. 까다로운 기관은 ‘벽면 도색 후 1주일이 지난 뒤 디스플레이 가능하다’와 같은 규정을 두기도 해요. 규정은 기관마다 정말 다양하기 때문에, 유연하게 조율하는 것도 큐레이터의 역량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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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디스플레이가 끝나고 전시회가 열리면 도슨트를 관리해야 해요. 대부분 큐레이터는 직접 도슨트가 되기보다는 도슨트를 교육하는 역할을 하죠. ‘이번 전시의 핵심은 이러이러하고, 이런 부분을 강조해서 설명해 주시면 좋겠다’ 라고 가이드를 해 드려요. 전시의 의도를 관객에게 전달하고 이해시키는 것까지가 큐레이터의 업무거든요.
전시회가 종료되면 이제 작품을 돌려 보내야죠. 그러면 전시 준비 과정의 작업을 역순으로 똑같이 진행해요.
Q. 그러면 큐레이터 업무는 ‘전시 준비’ 비율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맞아요. 국제전 같은 경우, 최소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준비 시간이 필요해요. 어떤 분들은 큐레이터가 전시만 열고 나면 놀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시더라고요. 그렇지 않아요. 쉴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전시회 하나 열고 나면 그 다음 전시를 또 준비해야 돼요. 저 같은 경우에는 연간 2회에서 많게는 4회까지 전시를 했기 때문에, 동시에 2개의 전시를 준비할 때도 많았어요.
전시 기획 = 프로젝트 PM
Q. 전시 준비 기간이 1년이 넘고, 여러 개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려면 정신이 없겠네요. 그렇다면 학예연구사 실무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뭘까요?
빠른 커뮤니케이션이에요. 전시는 열리는 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데드라인을 맞추려면 의사결정이 빨라야 해요. 학예연구사는 본인이 담당하는 기관의 대표자인 셈인데, 의사결정을 늦게 하면 상대방한테 신뢰를 주기 어려워요. 하나의 프로젝트를 매니징하는 PM처럼 생각하면 돼요.
저는 예전에 13개 정도의 대여처에서 작품을 빌린 적이 있어요. 한 번에 13개 기관의 담당자들과 소통하는 셈이죠. 대여처 외에도 전시장 디자인, 시각 디자인, 전시 설치 등 각 영역의 업체들과 조율이 필요해요. 그래서 학예연구사는 협업 능력이 가장 중요해요. 협업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잘 못한다면,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게 되고, 신뢰성이 떨어지는 기관에게는 작품을 아예 빌려주지 않는 경우도 생겨요.
마음에 구멍이 생긴 모든 직장인에게
Q. 모든 직장인은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고민하곤 해요. 용기 있게 ‘하고 싶은 일’ 에 다가간 연우님은 지금 어떠신가요?
제가 IT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는, 돈 들여서 석사까지 했으니 큐레이터로 취업해서 열정을 불태우자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웃음) 그 때에 비해 지금은 온도가 미지근해졌어요. 그래서 편하기도 해요. 사명감에 불타 나의 쓸모를 찾고 증명하기보다, 어디서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하는 것. 이게 열정이라고 생각해요. 번아웃을 피하고,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서도 모두 에너지를 조금은 남기며 일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모든 직장인들이 ‘사는 게 진짜 재미없고, 왜 이렇게 살고 있지?’ 하는 순간을 겪어요.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 같은 순간이죠. 그럴 때마다 내가 걸어왔던 과거를 심도 있게 돌아보면 좋겠어요. 내가 원하는 것과 잃은 것을 제대로 파악해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하고, 나아가 성장할 수 있다고 믿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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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에 담지 못한 연우님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싶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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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업에 진심인 직업인의 이야기, 근자람이 전해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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